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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 丙 仁 (韓國敎員大)

    Ⅰ. 머리말

    Ⅱ. ‘국적 없는’ 식민도시 상해

    Ⅲ. 국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 상해

    Ⅳ. 비정한 도시, 범죄의 도시 상

    Ⅴ. 맺음말

    Ⅰ. 머리말

    개항 이후 상해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고, 한국과 관계도 심화되어

    왔다. 1919년 이후 망명객들이 상해로 결집하고, 상해에서 일하는 전차

    검표원, 유학생 등의 수가 늘어나면서 상해와 한국의 관계는 더욱 빈

    번하게 되었다. 1924년에는 상해와 한국의 직항로 개통으로 경제 교류

    도 늘어날 가능성이 많아졌다. 상해와 한국의 연동성은 심화되고, 상해

    소식은 한국에 더욱 빨리 전해지게 되었다.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상해 소식은 한국인의 상해 인상을 형성했

    다. 세계적 국제도시, 무역도시로서의 특징을 부각시킬 때에는 동양의

    런던이나 파리, 뉴욕이란 별칭을 붙였고, 범죄가 많은 것에 초점을 둘

    때에는 동양의 시카고라고 불렀다. 한국인은 상해에서 무엇을 보았기

    에 이런 이미지를 덧붙였을까? 한국인이 상해를 보면서 자주 언급하며

    강조했던 것은 무엇이고, 상해를 통해 파악했던 근대의 이미지는 어떤

    것이었을까?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26한국인과 상해지역을 연관한 연구는 주로 독립운동사의 일환에서

    다루어졌다. 특히 임시정부와 관련한 연구는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

    가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외에 상해의 한인

    사회와 한국인의 생활과 교육 등에 관한 연구가 있다.1)

    또 다른 연구로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 상해 인식과 체험, 그리고

    문학 작품에 나타난 상해 인식 등의 문제를 다룬 연구가 있다.2) 이들

    연구는 한국인이 상해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상해의 도시 특징

    을 어떻게 파악했는가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상해 도시의 몇몇 상징적

    인 특징을 통합적으로 연결하여 한국인이 상해의 근대 혹은 상해를 통

    해 본 ‘근대’ 인식의 특징과 한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

    지 않았다. ‘모던’ 시대에 상해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보고 느끼면서 한

    국인은 상해의 근대 혹은 근대 사회 전환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그런데 상해에 대한 인식이나 상해를 통한 ‘근대’ 인식은 주체가 보

    았던 것, 보지 못했던 것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고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측면이 많다. 한국인이 보았던 상해 인상은 중국인이나 서양

    인이 본 인상과 다를 수 있다. 비록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지만, 한국인 사이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의식’으로 등치시키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연구를 보완하여 기록의 공통성에 주목하여 한국인의 상해 인식이란

    큰 흐름을 파악하면서도 한국인이 남긴 다양한 개인 기록을 도시사적

    인 맥락에서 대조,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상해에 관해 한

    1) 孫科志, 上海韓人社會史 (한울아카데미, 2001); 金光載, ‘上海居留朝鮮人會’(1933-1941) 硏究 (한국근현대사연구 35, 2005 겨울호); 김광재, ‘상해독립군’ 金時文의 上海 생활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4); 김광재, 일제시기상해 인성학교의 설립과 운영 (동국사학 50) 등.

    2) 김희곤, 19세기말-20세기 전반, 한국인의 눈으로 본 상해 (지방사와 지방문화 9-1); 최낙민, 김광주의 문학작품을 통해 본 해항도시 상해와 한인사회(동북아문화연구 26, 2011); 최낙민, 日帝 强占期 上海 移住 韓國人의 삶과기억 (해양도시문화교섭학 2); 정호웅, 한국 현대소설과 상해 (한국언어문화 36, 2008); 김승욱, 20세기 초반 韓人의 上海 인식 -공간인식을 중심으로- (중국근현대사연구 54, 2012.6) 등.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27국인이 남긴 기록을 뒷받침하거나 상반되는 여러 사실과 대비시켜 검

    토하여 상해 도시 발전의 특징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집합으로서’ 한국

    인의 ‘근대’ 인식의 특징과 한계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집합

    으로서’ 한국인은 상해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에서 어떤 것을 관심있게

    보았고, 무엇을 등한시 했는가를 파악하여 한국인이 상해의 근대 혹은

    근대 사회의 특징이나 발전 경로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검토하려고

    한다.

    Ⅱ. ‘국적 없는’ 식민도시 상해

    배가 黃浦江을 따라 부둣가로 들어서면 상해에 처음 온 사람은 큰

    배, 작은 배의 ‘엄청난’ 수가 황포강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인도인과 베트남인을 신기하게 처다 보고 있는 사이에 신참은 서로 손

    님을 받으려는 중국인 인력거꾼에게 둘러싸여 쟁탈 대상이 된다. 상해

    에 아주 익숙한 것처럼 ‘부야오(不要)’를 큰 소리로 외치거나3) 영어로

    “꼿 켓 어웨”를 소리쳐 인력거를 쫒아내고 내릴 때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번드’ 맞은편의 고층 빌딩이었다.

    부두에서 내려 황포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이는 건물들은 각국

    의 은행과 해관, 윤선초상국 등이었다. 서양의 각종 건축 양식을 모방

    하여 지은 많은 마천루들이 황포탄로를 따라 죽 늘어서 상해의 방문객

    을 맞이했다. 이 건물들은 대영은행(황포탄로 6호), 중국통상은행(7호),

    회풍은행(12호), 교통은행(14호), 맥가리은행(18호), 중국은행 등이었으

    며, 이 가운데 큰 원형 천장으로 된 석조 건물이 홍콩-상해은행(滙豊

    銀行)이었다. 황포탄로는 상해의 금융 중심지였다.

    황포탄로의 북쪽 끝에는 황포공원이 있었다. 황포공원은 1866년에

    工部局이 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웠는데 공원의 영문 명

    3)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28칭은 public park였고, 중국 명으로 公共花園, 公家花園으로 번역되었

    지만, 흔히 외국화원, 外灘公園으로 불렸다. 이 공원은 최초에는 외국

    인을 위해 만든 공원이었기에 공원 안에서 수많은 외국인을 볼 수 있

    었다.

    한국인이 황포공원에서 마주한 것은 “중국인과 개는 출입 못 함”이

    라는 팻말이었다. 1920년대 공공조계와 프랑스 조계의 공원은 인도인

    과 중국인 순사가 출입을 통제하여 잔디밭을 가구거나 백인의 시중을

    드는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4) 이 규정은 1927

    년 폐지되었지만, 윤치호가 1938년에 상해를 회상하면서 여전히 이 규

    정을 언급할 정도로 상해의 공원에 대한 기억은 강렬했다. 윤치호는

    중국인이 무감각하거나 혹은 신경이 무뎌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

    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그 앞을 지나며 몇이나 주먹을 불끈 쥐었

    는데 중국인이 태연자약한 모습에 놀랐던5) 것만은 틀림없었다. 중국인

    은 자신의 땅에서 ‘주인’으로서 삶을 빼앗겼다.

    조그만 현성에 불과했던 상해는 아편전쟁 이후 영국에 의해 개항되

    고 조계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영국조계와 미국조계가 만들어지고,

    후에 두 조계의 합병으로 공공조계가 형성되었으며 그 남쪽에는 프랑

    스 조계가 들어섰다. 그리고 공공조계와 프랑스 조계를 둘러싸고 중국

    인 거리가 있었다.6) 상해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4) 1916년에 반포된 규정은 제2조 개와 자전거는 들어올 수 없다. 3조 백인을 시

    중드는 중국 고용인을 제외한 중국인은 들어올 수 없다. 4조와 5조에서는 인도

    인(고급스러운 복장을 한 자는 제외)과 일본인(양복을 입은 자는 제외)까지 배

    제시켰다. 이 규정은 1927년에 폐지되고 입장권만 사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도

    록 개방되었다.(리어우판, 장동천 역, 상하이 모던 (고려대학교 출판부,2007), p.75에서 재인용)

    5) 尹致昊, 上海 생각 (삼천리 10-5, 1938. 5. 1).6) 1920-30년대에 상해의 개항과 도시의 변천, 재정, 경제 등을 개괄적으로 소개

    한 한국인의 글로는 上海寓客, 上海의 解剖 (개벽 제3호); 上海의 經濟的地位 (일)-(오) (동아일보 1932.4.2-1932.5.4); 大上海의 槪觀 國際都市로서而今戰港 (동아일보 1932.2.23); 洪陽明, 動亂의 都市 上海의 푸로필 (삼천리 4-3, 1932.3.1) 등 참조.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29조계는 중국인 행정권의 지배를 받지 않고 工部局과 工董局의 행정

    아래 독립된 국가처럼 행동했다. 영국조계와 미국조계의 합병으로 성

    립된 공공조계의 시행정은 工部局이 담당하였다.7) 1869년에 만든 규정

    에 따르면 工部局 동사회는 일정액 이상을 납부하는 납세자로 구성된

    납세인회의에서 선출하였다. 1920년 工部局 董事會는 9명 가운데 영국

    인이 7명, 미국과 일본이 각각 1명씩으로서 중국인은 工部局 행정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중국인은 조계 세금의 4/5 혹은 70% 이상을 납

    부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참정권을 주장했지만, 1930년 工部局에 5명의

    중국인 이사(화동)가 참여할 때까지 중국인은 ‘주인’으로서 조계 행정

    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공공조계는 工部局이라는 국가통제의 통치

    기구 아래에 있는 것으로 중국 안에 있는 “Impirium in imperio”였다.8)

    프랑스 조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 조계는 工董局이 행정을 집행

    하였으며, 프랑스 영사가 책임을 지고 관리했다.

    공공조계, 프랑스조계, 그리고 이 둘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閘北과

    남쪽의 南市로 나누어진 상해는 그 어느 하나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인없는 도시였다. 그 땅의 주인이었던 중국인은 공원에도 출입

    하지 못하고 자신이 노동력을 들여 생산한 물건을 몇 배나 비싸게 소

    비하는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9) 1925년 한국인이 보기에 중국인의 땅

    에서 중국인인 까닭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상해는 ‘현대의

    괴물’이었다.10)

    조계의 참정문제는 중국인의 오랜 고민이었다. 1919년 工部局이 세

    금을 늘리려하자 중국인 납세자들은 조계 행정에 중국인 동사가 참여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납세자회의는 華董案을 거부하고 華人顧問

    委員會 설립을 허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을 상해의 중소상인단체였

    던 各路商界總聯合會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20년 납세화인회가

    7) 공부국에 관한 한국인의 개괄로는 工部局 (동아일보 1935.11.14) 참조.8)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9) 渡英紀行 第一信 (동아일보 1925.1.4).10) 渡英紀行 第一信 (동아일보 1925.1.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30결성되고, 이곳에서 선출한 5명의 화인고문이 1921년 5월 11일에 취임

    하여 일단 자문의 형태로나마 중국인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를 조계 행

    정당국에 건의할 길은 열렸다.11) 1925년 5․30운동은 중국인 참정 문

    제에 다시 불을 지폈다. 5월 30일 상해 남경로에서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으로 상해의 반제 운동은 불거졌고, 이 수습책 가운데 하나

    가 공공조계 조직을 개편하여 工部局 행정에 중국인이 참가하는 문제

    였다.12) 工部局은 3명의 華董을 증설하기로 했지만, 納稅華人會는 원칙

    없는 분배를 반대하며 납세액에 따라 工部局 董事의 숫자를 배분할 것

    을 주장했다. 이후 몇 차례 교섭을 거친 후에 1930년 工部局에 5명의

    화동이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3) 프랑스 조계 역시 1930년에 9

    명으로 된 중국인 참사회를 조직하였다.14) 1925년 한국인이 여행기에

    서 말하듯이 참정권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1930년 工部局

    행정을 맡는 참사회의 이사로 중국인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일부 한국

    인에게 상해는 여전히 ‘코큰 사람들의 환락장’으로15) 인식되었다.

    상해는 한국인이 보기에 외국인이 북적대던 국제 도시였다. 1930년

    상해시 정부 조사에 따르면 공공조계에 39,947명, 프랑스 조계에

    22,922명이 있었고, 중국인 거리에 2005명이 있었다. 외국인은 국적별

    로는 일본, 러시아, 영국, 스웨덴, 미국, 브라질, 라트비아, 아르메니아

    11) 中國顧問五名 (東亞日報 1921.5.17).12) 中國側希望에 同意 (동아일보 1925.6.22); 工部局의改善 公使團提議 (

    동아일보 1925.10.10); 工部局의 組織改正 近近實現할 듯 (동아일보 1925.10.12).

    13) 盧漢超, 上海租界華人參政運動述論 (上海史硏究 2, 上海: 學林出版社,1988); 小浜正子, 關于上海公共租界中國人參政運動 (上海硏究論叢 8, 1993);金泰丞, 1930年代 以前 上海 公共租界의 支配構造와 華人參政運動 (東洋史學硏究 58, 1997) 등.

    14) 市參事被選과 租界回收運動 (조선일보 1927.2.11); 上海共同租界 漸進的으로 改造? (조선일보 1927.3.26); 猛烈한 國權回收熱로 血眼의 國民政府(동아일보 1930.2.2); 工部局 (동아일보 1935.11.14). 동아일보는 工部局의행정기구를 설명하면서 1920년 화동고문 이후의 참사회 이사로 중국인이 참여

    하게 된 과정을 누락하여 중국인 참정에 대해 잘못된 보도를 했다.

    15) 江南夏夜散筆 고향벗에게 보내 亂想(一) (동아일보 1935.8.6).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31등등이 혼합되어 있었으며 인도인, 필리핀, 베트남인도 그 식민 모국을

    따라 상해에서 순사 등을 하고 있었다.16) 그야말로 세계의 축도였던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상해를 보고 1차 대전 후의 세

    계적 흐름 속에서 사해동포의 관념이 성장하는 열린사회이자 각국민의

    조국이 없는 민족국가 체제를 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경우

    도 있었지만,17) 한편에선 조국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상해는 이들 개인

    을 보호하는 소속 국가의 군대, 군함, 국가권력 등을 배경으로 하여 상

    호 경쟁하고 暗流하는 사회로 생각했다.18) 약육강식 사회의 축도이자

    서양인이 주도하는 사회로 상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와 30년대에 공공조계나 프랑스 조계에서 절대 다수

    를 차지했던 것은 중국인이었다. 서양인은 상해의 남경로에서 자신의

    예상과 달리 중국인이 넘쳐나는 것에 놀랐지만19) 한국인이 주로 언급

    한 것은 서구인이었다. 유사하고 익숙한 중국인보다 생김새나 풍모가

    다른 외국인이 더욱 눈에 띠고 이국 이미지를 자극했기 때문에 주로

    서구인을 언급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은 서양인이 숫자가 적

    음에도 눈에 두드러진 것은 그들의 스피드와 활동력 때문이라고 적었

    다.

    황포탄로는 바로 제국주의 금융 자본의 중심지였다. 황포탄로에는

    회풍은행, 해관, 맥가리은행 등이 줄지어 있고 어느 나라 은행이고 이

    곳에 지점하나 아니 둔 이가 없다 할 정도였다. 이 은행의 “주둥이가

    4백주 방방곡곡이 아니 간데 업시 지나의 광산이나 철도이니 하는 끗

    을 물고 4만만 못 생긴 지나인의 고혈을 쭉쭉 빨아먹거니 할 때에 몸

    에 소름이 끼치오며 저 크다란 유리창 안 컴컴한 금궤 속에 지나 염

    세, 해관세, 郵稅 등 지나의 문권이 전당을 자피어서 기한이 다하기를

    16) 洪陽明, 動亂의 都市 上海의 푸로필 (삼천리 4-3, 1932.3.1).17) 上海寓客, 上海의 解剖 (개벽 3, 1920.8.25), p.107.18)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 p.10.19) Reverend C. E. Darwent, Shanghai: A Handbook for Travellers andResidents(1920; 臺北: 成文出版公司 重印, 1973), pp.10-12.(리어우판, 상하이모던, p.55에서 재인용).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32기다리”고20) 있으니 황포탄로는 “외국자본의 총본영 지대이며 동시 중

    국에 대한 지스토마와 12장충인 이들 자본의 흡반의 행렬”이었다.21)

    1925년에 신축한 회풍은행은 각성의 독군이니 순찰사니 하는 악도들이

    도적질해다가 이 은행에 맡기고 죽었거나 도망간 놈의 돈을 모아서 지

    은 것이라고 생각했다.22) 황포탄로는 금융의 중심지이자 중국 착취의

    대본영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호하는 것은 황포강에 떠있는 군함들이

    었다. “32산치 거대한 포구를 이 도회에 향하여 위협하고 잇는 강철의

    괴물-이 자본의 수호신들을 수십으로 수백으로 동동 띄우고 잇는 濁

    流滾滾의 황포강, 그 우로 항상 떠도는 농무 사이에 나부기는 기, 기,

    기 ······ 유니온 짹과 스타-스팽글드와 일장기와 삼색기의 모든 열강

    의 금융자본을 씸볼하는 기와 기가 舷舷 상마할 때의 청천백일의 회한

    의 눈물!”23)

    상해를 외국인이 주도하고 착취당하는 식민지 사회로 인식했던 한

    국 사람이 그에 대한 저항운동과 ‘자유도시’ 상해로 모여든 망명객들을

    주목했던 것 또한 인지상정이었나 보다. 국제 자본이 대지주를 이룬

    상해의 이면에는 필리핀 독립운동의 비밀결사가 있고, 인도,24) 안남의

    민족운동 단체가 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활동하고 있다.25) 한국인

    에게 상해는 더욱 특별한 곳이었다. 상해의 화려함이나 번화함, 기이함

    과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보다도 한국의 피끓는 청년과 선구자들의 족적

    이 수천수만으로 찍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26)

    20) 李光洙, 名文의 香味, 上海에서 (삼천리 6, 1930.5.1), p.72.21) 金世鎔, 印度特輯, 上海의 印度人 示威運動光景 (삼천리 17, 1931.7.1),p.47;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

    22) 渡英紀行 第一信 (동아일보 1925.1.4).23) 洪陽明, 上海風景, 누-란 事件 (삼천리 3-12), p.38; 金世鎔, 印度特輯,上海의 印度人 示威運動光景 (삼천리 17, 1931.7.1), p.47.

    24) 金世鎔, 印度特輯, 上海의 印度人 示威運動光景 (삼천리 17, 1931.7.1),p.48.

    25) 洪陽明, 上海風景, 누-란 事件 (삼천리 3-12, 1931.12.1).26)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 朴勝喆, 獨逸가는 길에

    (1) (開闢 21, 1922.3.1), p.74; 上海學生團을 歡迎하노라 (동아일보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33한국인은 상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운동의 흐름도 주목했

    다. 상해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자본의 크기와 착취의 정도에 비

    례하여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해는 동양에서 계급투쟁이 가장 첨예

    화하고 심각한 지대가 되었다고 파악했다.27) 아울러 ‘개와 중국인은 출

    입 금지’ 규정을 타파했던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을 보면서28) “‘외국인

    은 중국 경내에 入함을 금함’이라는 노-튀스를 보게 될 날도 잇슬지도

    모를 오늘이다”라고 언급했지만, 여전히 짐을 싸고 집을 팔겠다는 ‘양

    코백이’를 아직 하나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

    다.29) 한국인에게 상해는 외국인이 지배하는 국제도시였고, 그에 맞서

    는 독립운동과 저항운동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황포탄로를 거쳐 글과 말로 듣던 상해를 방문한 한국인에게 인상적

    인 곳은 남경로였다.30) 남경로는 마치 모든 사람이 거리에 나온 것 마

    냥 인파에 떠밀리다시피 걷게 되는 ‘지나치게’ 활력이 넘치는 거리였

    고, 그 거리 양편의 17층 고층건물과 백화점들은 상해의 화려함을 상

    징하는 듯했다. 남경로는 상해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상해를 대표하

    는 거리였다.

    양편의 상점은 모두가 높고 큰 빌딩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장식으로 말

    하자면 건물 구조가 화려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으며 힘써 미관을 추구

    한다. ······ 대형 백화점, 큰 비단 가게, 큰 금은방 등 진열장내의 배열이

    호화찬란하여 눈을 뗄 틈을 주지 않으며, ······ 밤이 되면 양쪽의 전등

    빛이 이 평탄한 큰 길을 환하게 비추어 마치 거울처럼 번쩍번쩍 반사해

    내어 그 안에 들어가면 마치 유리세계에 들어 온 듯하다.31)

    이런 화려함에 정신을 팔려 교통순경의 ‘고, 스톱’을 잘못알고 걷다

    1922.8.3).

    27) 洪陽明, 上海風景, 누-란 事件 (삼천리 3-12, 1931.12.1).28) 中國人侮辱待遇打破 (동아일보 1928.4.22).29)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30) 南遊汗漫草(三) (동아일보 1930.1.16); 遊歐道中記(十一) (동아일보

    1934.10.12); 이광수, 名文의 香味, 上海에서 (삼천리 6, 1930.5.1) 등.31) 徐國楨 編著, 上海生活 (上海:世界書局, 1933), p.91.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34가는 10중 8,9는 병원 한구석에서 누워있을 것이며, 길거리의 미인에게

    순간적으로 눈을 팔려 방향을 놓치면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의 팔꿈치

    와 어깨에 수없이 부딪치는 수난을 당할 것이었다.32)

    남경로의 건물과 거리는 서구식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1930년 上海指南에 소개된 상점을 상해의 각 지역과 거리별로 나눠보면 남경로는 고급 백화점과 귀금속 상점 등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고급종합상

    권이었다.33) 한 한국인 작가가 보기에 이런 근대의 번화한 도시를 만

    든 것은 서구인이던 반면에 이 번화한 길거리에서 일하는 인도와 베트

    남인 순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골동품같은 존재였다. ‘홍건적 같은 인도

    순사, 청삿갓 쓴 안남의 순포’의 수염과 상투는 험상스럽고 흉물스러워

    진저리가 났다. 남경로와 황포탄로의 번화함은 ‘산 도회’임을 느끼게

    했지만, 단발을 하지 않은 채 일하는 인도인 순사는 ‘골동품’이었다.34)

    한국인들이 그다지 많이 소개하지 않았지만 황포탄로와 남경로 이

    외에도 상해에는 다양한 특색을 지닌 거리가 많았다. 황포탄로에서 약

    간 떨어져 북경로와 남경로를 종단하는 영파로와 천진로에는 전통 금

    융기관인 전장이 밀집해 있었다.35) 전장은 상해 상인들의 주로 이용하

    는 전통 금융기관으로서 황포탄로의 은행과 함께 금융 중심지를 형성

    했다. 한국인은 전장이 낙후하고 국제 자본주의 침략의 앞잡이라고 보

    았지만,36) 전장은 상해의 상인이나 공장이 자금을 융통하는 중요 기관

    이었으며, 1920-30년대에도 상거래 결제 시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

    전장이 발행한 장표였다. 전장은 상해의 금융과 상업 발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남경로만큼 유명한 거리가 흔히 四馬路라고 불리는 복주로였다. 복

    32) 洪陽明, 楊子江畔에 서서 (삼천리 15, 1931.5.1), p.10; 金世鎔, 印度特輯,上海의 印度人 示威運動光景 (삼천리 17, 1931.7.1), p.47.

    33) 李丙仁, 1930年代 上海의 區域商圈과 消費生活 (중국근현대사연구 17,2003.3), pp.49-50.

    34) 張獨山, 上海雜感 (개벽 32, 1923.2.1).35) 李丙仁, 1930年代 上海의 區域商圈과 消費生活 , p.41.

    36) 上海의 經濟的地位(五) (동아일보 1932.5.4).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35주로는 황포탄로나 남경로와 달리 중국인의 풍취가 물신 풍기는 도로

    였다. 남경로가 호화로움 때문에 돈없는 사람의 기를 죽게 만들었다면

    복주로는 고급 상점과 중급 상점이 뒤섞여 있었고, 그 때문에 중국인

    들이 훨씬 편하게 느끼는 거리였다. 또한 서점이 밀집하여 있어 남경

    로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김광수는 사마로는 순전히 중

    국식 거리요 또 서점의 거리라고 소개했다.37) 한마디로 중국인이 만든

    중국인의 거리였던 것이다.

    아울러 공공조계의 다른 지역도 전문화된 상권을 형성하며 거리마

    다 특색이 있었다. 북경로, 박물원로, 사천로, 강서로 지역은 수출입 업

    종이 집중된 구역이었다. 그리고 복건로와 복주로 일대는 숙박업이 몰

    려있었다. 복주로를 중심으로 수직으로 교차하는 지점은 여관업이 집

    중적으로 발달하였는데, 1930년 상해지남에 소개된 업소 가운데 약50% 정도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38) 그리고 공공조계의 동북과

    서북 지역은 공장 지대로 발전했다.

    프랑스 조계는 공공조계와 달리 발전했다. 公館馬路는 중저가 상권

    을 형성했고, 霞飛路는 유럽이나 미국의 고급 생활품과 명품을 판매하

    는 상해 유행의 근원지였으며, 카페와 오락문화가 발달했다. 프랑스 조

    계의 서쪽 지역은 화원주택이라 불리는 고급 주택단지가 밀집한 지역

    이었다. 조계 밖의 남시와 갑북은 또 다른 특징이 있었다. 남시 지역은

    상해 현성과 그에 인접한 지역으로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흥미를

    유발하지 않았지만, 절인 음식과 건어물을 파는 전문화된 또 다른 상

    권이었다. 갑북은 공공조계 북쪽 지역으로 빈민들이 많이 거주했다.

    상권과 지역 발전의 불균등 발전과 병행하여 고급 주택가와 서민들

    의 주택, 그리고 빈민가라는 지역사회의 분화를 야기했다. 공공조계의

    정안사 부근과 북구의 일부, 프랑스 조계의 서쪽 지역은 화원주택이라

    불리는 고급 주택 단지가 형성되었다. 일반 서민들은 石庫門으로 알려

    37) 江南夏夜散筆 故鄕벗에게 보내 亂想(一) (동아일보 1935.8.6).38) 李丙仁, 1930年代 上海의 區域商圈과 消費生活 , p.42.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36진 중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독특한 건물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조계주변을 빙 둘러친 판자촌과 수상 가옥이 빈민가를 형성했

    다. 이들이 상해 사회의 노동력과 산업예비군으로서 작용했다. 수상가

    옥은 낭만의 상징이 아니라 도시 내에서 집조차 구할 수 없던 가장 열

    악한 도시 빈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이처럼 상해의 행정 권력은 나누

    어있었으나 도시의 공간 구성과 활용은 이미 하나의 유기적인 연관관

    계를 갖고 분화되고, 계층에 따라 공간 활용이 다른 불균등하고 위계

    질서화된 근대 도시 구조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간 배치

    의 형성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국인은 도시 건설에서 중국인이 한 역할과 공헌을 기록하고 전달하

    는데 인색했다. 결과적으로 상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의 역할

    은 생략되었다.

    Ⅲ. 국제 무역과 교역의 중심지 상해

    상해는 중국 대외교류의 중심지였다. 상해는 개항 이후 廣州를 젖히

    고 중국 50여개의 항구 중에서 대외무역의 40-50% 이상을 점유하여

    왔다. 한 예로 1913년 대외무역 총액 9억 7346만 海關兩 가운데 상해

    가 4억 2131만 해관량을 차지하여 43.3%를 점하였다. 1927년 중국 5대

    항을 드나들었던 선박의 톤수를 보면, 상해가 30,151,653톤, 한구

    4,603,483톤, 청도 5,336,421톤, 광동 7,544,530톤, 천진 2,922,445톤으로

    상해가 약 70%를 차지했다.39)

    상해 대외 무역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을 중

    심으로 한 서양 무역, 일본, 한국, 대만의 동아시아 교역 그리고 동남

    아시아 교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무역량이 가장 많았던 곳은

    서양 무역으로 1937년 중일사변 이전에 상해 대외 교역의 70% 이상이

    39) 洪陽明, 動亂의 都市 上海의 푸로필 (삼천리 4-3, 1932.3.1), p.34.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37구미국가와의 교역이었다. 상해는 미국과 유럽에서 주로 기계류 등을

    수입하고 원자재를 수출하는 형태였다. 동아시아 교역은 일본이 주도

    했는데, 대략 상해 총무역액의 15-25%사이를 점유했고, 유럽 교역과

    유사하게 공산품을 수입하고, 원료를 수출했다.40)

    국가별로 볼 때, 해외 무역을 주도했던 것은 영국, 미국, 일본과 독

    일 상인이었다. 영국은 상해의 개항 이후 줄곧 대외 무역을 주도했으

    나 1차 대전 기간과 그 이후 무역액이 상당히 감소하여 미국, 일본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전쟁 전에는 20-30社였던 미국 상사는 1920년 당

    시에는 90여개로 늘어났으며, 일본은 43社에서 52社로 늘어났다.41) 그

    러나 영국 상인의 활동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를 잡고 있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나 홍콩의 무역까지 염두에 둔다면 그 무역량은 여전

    히 무시할 수 없었다. 1927년 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영국 선박의 상해

    출입이 가장 많았는데, 영국이 8,978척, 일본 5,511척, 미국 2,341척 등

    이었다. 1932년 통계에 따르면 외국무역상은 영국이 440, 미국 412, 독

    일 105, 프랑스 98 등이었으며,42) 1936년 수출입상의 60% 정도가 歐美

    人이었다.43) 동아시아 무역은 일본상인이 무역의 중심을 형성했다.44)

    그러므로 상해가 중국 통상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출입 선박이 동양에

    서 제1위인 것은 모두 외국인의 등살 때문이라고 한국인은 파악했

    다.45)

    한국은 대중무역에서 거의 入超였다. 1920-30年代 한국의 최대 무역

    상대국은 중국이었는데, 수출의 90% 이상, 수입의 70% 이상이 중국과

    교역이었다.46) 대중무역에서 지역별로는 주로 만주와 화북지방과 교역

    40) 李丙仁, 中華民國時期 上海의 交易 네트웍과 物流 (中國史硏究 28, 2004.2).

    41) 上海寓客, 上海의 解剖 (개벽 3, 1920.8.25), p.109.42) 上海市地方協會, 民國二十二年編上海市統計 (1933), 商業, p.1.43) 上海社會科學院經濟硏究所·上海市國際貿易學會學術委員會 編著, 上海對外貿易 (上海社科院, 1989), p.200; 熊月之 主編, 上海通史 -民國經濟 8권 (上海人民出版社, 1999), p.44.

    44) 李丙仁, 上海의 交易 네트웍과 物流 , pp.200, 204-205.

    45) 渡英紀行 第一信 (동아일보 1925.1.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38

    수출 수입 계

    인천 4,523,000 12,391,000 16,914,000

    부산 256,000 1,360,000 1,616,000

    군산 28,000 298,000 326,000

    진남포 365,000 1,258,000 1,623,000

    기타 11,488,000 47,478,000 58,966,000

    계 16,660,000 62,785,000 79,445,000

    을 하였고 상해나 화중, 화남과 교역 비중은 낮았다. 1919-1923년 동안

    한국의 대중국 평균 수출액은 18,193,000엔이고 수입은 62,332,000엔이

    었다.47) 한국에서 중국으로 수출했던 것은 해산물, 인삼, 엽연초였으며,

    수입한 물품은 곡류, 사탕, 繰綿, 麻布 등이었다.48) 무역항로 또한 일본

    의 선박을 이용하여 대련으로 향하거나 육로를 통한 국경 교역이 많았

    고, 1924년까지 상해로 직접 운항하는 직항로는 없었다.

    표 1) 1923년 중국과 한국의 항구별 무역 상황 (단위: 엔)

    주) 對中貿易狀況 , 東亞日報 1924. 4. 4.주2) 1923년 수출, 수입 합계와 수출입 총합계, 군산의 수출입 합계에 오류가 있어 정정.

    한국의 대중국 교역에서 상해가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0-20%정도

    에 지나지 않았다. 1919-1923년 상해를 포함한 남중국과의 5년 평균

    수출입액은 13,595,000엔으로49) 전체 무역의 17%가 조금 못되었다. 한

    국의 대상해 무역 역시 거의 입초였는데, 중국의 해관통계 자료에 따

    르면 1918년에 上海가 한국에서 수입한 액수는 153,000海關兩이었던

    것에 비하여 한국으로 수출한 액수는 1,375,000海關兩이었다. 1926년에

    는 上海가 278,000海關兩을 수입하고, 5275,000海關兩을 수출했으며,

    1930년에는 수입 2,713,000海關兩, 수출 2,842,000海關兩이었다.50) 수입

    46) 中國第二歷史檔案館 中國海關總署辦公廳, 中國舊海關史料 (京華出版社,2001)의 각 년도 ; 송규진, 『日帝下 朝鮮

    貿易 硏究』(高大 民族文化硏究院, 2001), pp.105, 108.

    47) 上海航路 (동아일보 1924.3.11).48) 對中貿易狀況 (동아일보 1924.4.4).49) 上海航路 (동아일보 1924.3.11).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39품은 麻布, 絹織物, 緞子와 繻子, 철광, 소맥분 등이고, 수출품은 주로

    홍삼, 엽연초, 염어, 사탕 등이었다.51) 상해 등 중국 남방으로 수출한

    수산물은 중국이나 일본 상인이 수집하여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수출했

    다.52)

    그런데 1924년에 朝鮮郵船會社가 한국에서 상해로 직항하는 항로를

    열기로 결정했다. 상해 직항로의 개척은 상해와 한국의 직접거래로 경

    제 관계의 심화를 의미했으며, 출항 기점과 기항지는 그 지방 경제 발

    전과 직접 연관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이에 목포, 군산, 진남포 등지에

    서는 부민대회를 열고 청원활동을 하기도 했다.53) 상해로 떠나는 기선

    의 출발지, 기항지를 놓고 심각한 로비가 벌어졌다. 진남포 상업회의소

    는 진남포가 1922년 대상해 무역액의 50%를 점유하였으며, 인천과 마

    찬가지로 평양이란 소비지가 있으므로 기항지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

    장했다.54) 경제적으로 볼 때, 상해와 거래는 경제 발전과 새로운 도약

    의 기회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1924년 6월 6일 한국에서 상해로 직항하는 첫 배가 떠났다. 첫 출항

    은 기대와 달리 한산하고 관광객이 많았다. 그러나 곧 이은 2차 항해

    서는 8백 여 톤의 화물을 실고 떠났고 점차 많은 물류가 이동하기 시

    작했다.55) 上海航路의 개설로 한국과 상해의 경제 연동성이 심화되었

    다. 그러나 상해-한국 항로의 운항과 물류 이동은 정치적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이 國民革命으로 정치적 격변을 겪던 때에 상해

    항로의 대중무역은 부진을 면지 못했다.56) 또한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였기 때문에 중일관계의 악화는 한중 무역 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50) 上海對外貿易, p.500.51) 上海航路와 貿易 (동아일보 1924.5.31).52) 上海航路開始는 朝鮮産業飛躍의 機會 (동아일보 1924.2.18).53) 上海航路決定 (동아일보 1924.3.20).54) 南浦上海貿易 全朝鮮의 五割 (동아일보 1924.3.4).55) 上海航路狀況 (동아일보 1924.7.16); 上海航路盛況 豫想과 反對 (동아

    일보 1925.3.4); 朝郵上海線滿船 (조선일보 1924.12.21).56) 對中貿易挽回를 總督府에서 考慮中 (동아일보 1927.11.20).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01931년 9·18사변과 32년 1·28사변 등으로 배일운동의 격화되면서 한국

    의 홍삼, 松高織 등이 타격을 받았다.57) 급기야는 거의 무역이 두절되

    는 상태에 이르고 일본이 협조 외교를 추진했던 1934년 이후 다시 上

    海航路가 살아나기 시작했으나 7·7사변으로 다시 항로는 중단되었

    다.58)

    직항로 개설에 따른 우려 또한 있었다. 출입인원이 늘어나 상해의

    호열자가 곧바로 인천이나 부산으로 전파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거의

    매년 발생하고 있는 상해의 호열자를 대비하여 상해와 왕래가 많은 항

    구는 방역시스템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59) 또한 일제는 상해와 직

    항로 개척으로 한국의 독립운동 사상이 더 빨리 퍼지지 않을까 우려하

    여 수상서 건설을 계획했다.60)

    이 보다 더 우려되는 일은 상해와 직항로 개척에 따른 경제적 종속

    이었다. 일반적으로 상해로 가는 직항로 개척은 무역량의 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 혜택을 누가 받는가는 다른 문제였다.

    한국에서는 상해 직항로 개척으로 일본 상인만이 혜택을 볼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기존 대중무역 상황을 볼 때 일본 상품에 남중국의

    상품이 덧붙여져 이중으로 압박을 받을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汽船

    이 가저오면 그만큼 가저간다 하겟스나 그러치안타. 中國에서 原鹽을

    적래한 戎克船이 인천에서 山東原鹽을 풀고는 모래를 싯고간다”61) 또

    한 이런 상품의 수출입도 중국 상인이 주도했는데, 1920년 인천세관을

    57) 柳光烈, 上海와 韓國人 (동광 31, 1932.3.5), p.19; 上海事變과 日本財界-事業家貿易商 등 一般이 靜觀中 (조선일보 1932.2.2); 朝郵上海航路 當分間休止 (조선일보 1932.2.28) 등.

    58) 常態恢復한 朝鮮對中貿易 (동아일보 1934.4.11); 朝郵上海航路 活況 (동아일보 1935.4.25); 日中關係好轉으로 上海航路更生 (동아일보 1935.5.3);上海航路回復 漸次商取引增加 (조선일보 1935.5.3); 事變後中止된 上海航路復活 (동아일보 1938.3.16) 등.

    59) 仁川上海間直航과 념려되는 녀름의 괴질 (동아일보 1924.5.7); 濟物夜話(동아일보 1924.5.9).

    60) 獨立團이 무서워서 (동아일보 1924.5.18).61) 對中貿易狀況 (동아일보 1924.4.4).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41통해 들어온 마포는 중국인이 80%, 한국인이 20%를 수입했다.62)

    한국인이 상해의 상관행을 잘 모르는 것도 걱정되는 일이었다. 직항

    로 개항 이전에 일본을 통해 교역을 해왔던 만큼 상해의 경제 관행이

    나 중국 상인에 대한 이해가 적었다. 일본은 중국의 상관습을 세밀하

    게 연구하고 무역관계를 확장해갔지만, 한국은 상해의 상관행을 잘 이

    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손해를 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63) 예컨대 상해의 상인들은 교역을 할 때에 신용을 중시하여

    초입자의 상계 진출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64)

    상해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국제적인 상관례를 받아들였다. 외국상인

    의 진출로 중외 교역이 늘어났으나 중국 상인은 서양 상인과 거래 초

    기에 국제적인 관례를 몰라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분쟁이 법정으

    로 비화되었을 때 중국에서 습관적으로 해오던 방식에 의존했던 중국

    상인은 법 지식의 결여, 제도의 미비로 거의 패배했다. 이에 국제 상관

    행과 결제 절차 등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었으며, 중국의 상법과

    상관행을 표준화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청과 민국 정부가 상법과

    관례를 정리하고 상인 또한 각종 분쟁 사례를 중심으로 국제관례와 상

    해의 상관례를 편찬하여 상인들에게 참고용으로 제공했다.65) 만일 국

    제적 상관례만을 따른다면 한국과 상해의 거래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해의 상인은 국제교역에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상관습을

    따른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중국의 상인은 해외의 화교 상인과

    거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상업 습관을 그대로 적용

    했다. 일본과 유럽, 미국과의 교역에서도 소규모 거래나 틈새 시장에서

    는 華商 네트워크를 통해 중국 상인이 활동하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62) 布木商의 窮狀 (동아일보 1920.5.1).63) 上海航路와 貿易 (동아일보 1924.5.13); 對中貿易狀況 (동아일보

    1924.4.4).

    64) 對中貿易은 直接販賣機關必要 (동아일보 1924.3.16).65) 嚴諤聲, 上海商事慣例 (新聲通訊社出版部, 1933.2); 박경석, 중국의 ‘商慣行明文化’와 근대적 재구성 (중국근현대사연구 57, 2013.3) 참조.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2화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상인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동남아시아 경

    제권이나 무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상해의 福建幇,

    廣東幇 등은 동남아시아의 복건, 광동 출신의 상인과 거래 관계를 맺

    고 물품을 유통시켰다.

    상해의 국제 교역과 국내 교역이 만나는 접점에는 매판이 있었다.

    해외무역은 서양 상인이 주도하는 국제 관계였지만, 중국에 물품을 유

    통시키는 국내 교역은 한국의 신문이 우려했던 바와 같이 중국의 전통

    관행이 깊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서양 상인들은 중국의 상관습

    을 잘 알고 있는 대리인, 즉 買辦을 내세워 거래 관계를 트는 경우가

    많았다.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가 그러했고, 영미연초공사도 중국인 대

    리인을 내세워 중국 시장을 공략했다.66)

    그런데 매판은 종종 고용인인 洋行과 중국 상인 모두에게서 오해를

    낳고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매판은 대리인이면서도 중

    국 상인이었기에 중국의 상관습에 익숙했고, 동향 네트워크 등을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매판은 마치 經理처럼 행동하며 판매

    대금을 유용하기도 하고 全權을 결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

    므로 중국 상인들은 매판을 모든 책임을 지는 중국의 經理와 같이 이

    해하고 상거래하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67) 매판은 외국

    인이 중국 시장에 접근하고, 중국인이 기존의 상습관을 유지하면서 세

    계 시장과 만나는 접점에 있었다.

    한편, 1920-30년대 상해의 국내 물품 유통 과정과 상거래 방식은 여

    전히 재래의 방식과 관행에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 상거래에서

    동향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고, 동업단체이자 동향

    단체인 회관과 공소는 業規를 통해 상거래 공동 규칙을 만들며 영향력

    66) Sherman Cochran, Encountering Chinese Networks: Western, Japanese,and Chinese Corporations in China, 1880-1937 (University of CaliforniaPress, 2000).

    67) 매판의 지위와 권한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嚴諤聲, 上海商事慣例,pp.217-218 참조.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43을 행사했다. 아울러 도량형이나 화폐제도 등도 통일이 안 되어 있었

    고, 각 업종마다 습관이 서로 달랐다. 유통 과정을 보면, 통상 行이 농

    촌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莊客을 거쳐 상해의 行家나 號家에 물건을 넘

    겼다. 그러면 行家는 跑街 등을 시켜 구매자를 물색하여 물건을 넘겼

    다.68)

    중국인은 국내의 상 습관을 유지하고 확대하면서 국제 교역과 세계

    시장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中國人經營의 대백화점 先施公司와 新新

    公司는 참으로 아모데 내노하도 뒤지지 아니할만 하더이다. 중국 사람

    은 商理에 大端히 밝은 사람들이라 이곳에서도 商權만은 뺏기지 아니

    한 듯 하더이다. 어느 租界에 가던지 모두 中國 사람이 商權을 쥐고

    잇습니다.” “내가 租界를 보기 전에는 모든 租界는 外國 사람이 쥐엇

    거니 하엿더니 實際로 보니 모두 意外로 大部分 中國 사람들의 手中에

    잇엇습니다. 이것이 非但 上海뿐이 아니라 香港이나 新嘉坡나 彼南이

    나 또 저 南陽의 여러 섬까지 모두 중국 사람들이 商權을 쥐고” 있었

    다.69) 중국인은 제국주의 틈바구니에서도 외국인에 못지않게 상권을

    장악하고 상해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있었다. 한국인은 국제 대항인

    상해와의 교류를 경제 발전의 기회로 인식하고 중국 상인의 성장을 알

    았지만, 일본과 화상을 통한 간접 거래, 그리고 직거래 이후에도 정치

    적 상황 변화 때문에 상해 상거래 내부에서 작용하는 중국의 상거래

    습관에 대해서 이해할 기회가 적었고, 상해 경제의 중층적 이행 과정

    을 인식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다.

    Ⅳ. 비정한 도시, 범죄의 도시 상해

    개항 이후 서양에는 새로운 오락문화가 들어왔다. 金星은 1923년 상

    68) 李丙仁, 上海의 交易 네트웍과 物流 , pp.206-212.

    69) 遊歐途中記(十一) (동아일보 1934.10.12).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4해의 여름을 소개하면서 미국인은 베이스 볼을 즐기고, 영국인은 크리

    켓, 인도인, 일본인 등은 테니스를 치며 놀고 때로는 경마대회를 열었

    다고 소개했다. 노천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황포강에서 보

    트를 타면서 즐긴다고 썼다. 그런데 “이 죠은 설비들은 모다 백인들이

    백인들 자신을 위한 거시오 그 땅의 주인인 중국인을 爲始하야 그밧

    동양 사람들은 그들의 잘 노는고 유쾌하게 지나는 거슬 구경하는 것으

    로 일종 변태적 쾌락을 엇고 잇는 것이 사실일다”고 했다.70)

    영화는 여가를 즐기는 아주 좋은 오락거리였다.71) 잘 갖춰진 극장

    시설은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이었고, 새로운 문화를 느끼고

    여가를 즐기는 한 방편이었다. 영화는 서구 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서구문물을 접하고, 서양에 대한 동경을

    키우며 할리우드 스타의 복장을 모방하며 유행이 형성되었다. 돈 많은

    사람은 영화에 나왔던 가구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양에 대한

    동경이 퍼져나갔다. 상해의 시민들은 서양의 오락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서구식 문화에 물들어가는 면이 있었다.

    서구에 대한 동경은 양복, 커피숍, 서양 음식점이 퍼져나가게 만들었

    다. 학생들은 전통 찻집보다는 커피숍을 찾았다. 공원 또한 한가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한국인들이 공원에서 한가

    한 시간을 보냈듯이 중국인의 공원 출입 금지가 없어진 이후로 공원을

    출입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국인이 늘어갔다.

    상해를 방문한 한국인들이 한번쯤 가보고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상해의 환락적이고 퇴폐적인 밤 문화였다. 낮을 화려한 건물이 장식했

    다면 화려한 네온사인이 상해의 밤을 밝혔다. 상해는 밤이 되면 환락

    의 구렁텅이로 변하여 댄스홀, 카페, 競犬, 하이 알라이, 에로틱 하고

    그로테스크한 맛사지, 음란극, 기녀들이 널려 있어, 하룻밤에 수십만불

    을 소비하고도 환락을 싫어할 줄 모르는 상해로 변했다.72)

    70) 金星, 上海의 녀름 (개벽 38, 1923.8.1).71) 상해의 영화관에 대한 소개는 金遠東, ‘上海映畵’報告記 (삼천리 11-7,

    1939.6.1) 참조.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45가로등이 켜질 무렵이면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이 거리에서 사내들

    을 유혹했다. 이민 사회였던 상해는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성비가 심

    히 불균형한 사회였는데, 1930년 華界는 135%, 공공조계는 156%, 프랑

    스 조계는 149%로 남자가 많았다.73) 성비 불균형은 결혼문제뿐만 아

    니라 가난한 여성의 생계와 맞물려 부녀 매매와 매음이 성행하게 만들

    었다. 1933년 국제연맹 부녀 조사단은 매매된 부녀는 주로 창기가 되

    었는데, 홍콩과 상해 두 곳이 극심하다고 주장했다.74) 국민혁명으로 중

    국 정국이 불안하자 교민과 상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 미국 등

    에서 파견한 군사의 40%가 성병을 앓았다는 설이 신문에 소개될 정도

    로75) ‘野鷄’라 불리는 창기들은 많았고76)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범죄 또한 만연했다. 남경로의 번화한 곳을 벗어나 옆 골목에 발을

    들여놓으면 거지, 거지, 거지떼에 진저리를 치고, 강도, 깽, 협잡배가

    횡행했다. 한걸음 잘못 디디면 제 몸에 찬 재물은 물론이고 의복, 심하

    면 생명까지 빼앗기는 곳이 상해라고 느꼈다.77) 별건곤이 소개한 사례에 따르면 외국어는 어느 나라 말이던지 충분히 할 수 있는 절세미

    인이 주머니에 돈푼이나 있어 보이면 그 나라 말로 유혹을 하여 끌고

    가서 가진 돈은 물론이고 시계, 만년필 같은 것까지도 빼앗았다. 멋모

    르고 상해의 호젓한 곳을 다니다가는 이런 미인에 유혹되어 자칫하다

    가는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될 수 있는 곳이 상해였다.78) 1936년 7월

    한 달간 발생한 범죄건수는 1,393건인데, 그 가운데 1,272건을 검거했

    72) 黃浦江人, 三百萬名 사는 上海 最近의 모양은 엇더한가 (삼천리 8-1),p.170.

    73) 鄒依仁, 舊上海人口變遷的硏究 (上海人民, 1980), pp.122-123의 표.74) 國聯婦女調査團主張廢止港滬公娼 (東方雜誌 30-13, 1933.7.1).75) 횡설수설 (동아일보 1927.6.21).76) 南國片信 (조선일보 1933.10.26).77) 呂運弘 李光洙, 上海·南京·北京 回想 (삼천리 8-12, 1936.12.1), p.42; 黃浦江人, 三百萬名 사는 上海 最近의 모양은 엇더한가 (삼천리 8-1, 1936.1.1),p.171.

    78) 世界大誘惑 밤에 피는 꼿, 各國女子生活의 秘密 (별건곤 15, 1928.8.1),p.168.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6다. 이 가운데 살인 3, 살인미수 2건, 유괴 3, 무장 강도 27, 밤 도둑

    25, 가택 침입 29, 절도 786 등이었다.79) 그리고 팔이나 다리에 끔찍스

    런 상처를 보이며 구걸을 하는 거지들이 상해에는 많았다.80) 이들 거

    지들의 뒤를 봐주는 것은 조직 폭력배들이었다.81)

    흔히 청방과 홍방으로 알려진 조직 폭력배들이 상해의 범죄와 아편

    흡식의 만연 등에 일조했다. 한국의 삼천리, 개벽이나 별건곤 등에 소개되었듯이 청방은 水運에 종사하던 水夫에서 유래하여 1920-30

    년대에는 苦力에서 금융가 등에 이르기까지 상해 내에서 막강한 세력

    을 형성했다. 청방은 아편판매, 납치, 도박 등 각종 범죄에 개입했다.

    상해에 환락과 범죄가 만연하고 청방이 세력을 떨쳤던 이유는 군벌

    과 정부 관리의 부패라고 한국의 언론은 꼬집었다. “군사장관들은 自

    位를 공고히 하는 무제한의 병사를 양육키 위하야 아편을 만히 재배하

    야 그 수입으로써 軍餉에 쓰며 사복을 채웠는데” 관리가 들기만 하면

    기십만근이라도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아편을 능히 운반할 수 있었

    다고 기술했다. 盧永祥이 해군의 운반함을 이용하여 공공연히 판매해

    서 얻은 일년 수입이 이천여만원이나 되었기 때문에 齊燮元과 盧永祥

    사이에 벌어졌던 ‘江浙戰爭’이 바로 아편 수입을 노린 ‘아편전쟁’이라고

    불리는 이유라고 설명했다.82) 상해의 퇴락에는 당시 군벌의 부패, 그리

    고 그를 도와주며 아편 판매를 담당했던 靑幇이 있었다.

    청방이 더욱 세력을 확장하게 된 것은 4․12쿠데타를 도와 장개석

    의 청당 활동을 도운 이후였다. 청방은 中華共進會를 결성하여 갑북의

    공인규찰대를 습격하고, 이후 공산당의 세력을 일소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83) 그 결과 杜月笙은 小將參議의 직책을 부여받아 상해의 명사로

    79) 黃浦江人, 三百萬名 사는 上海 最近의 모양은 엇더한가 (삼천리 8-1,1936.1.1).

    80) 악착한거지떼(二) (동아일보 1925.12.26); 朴勝喆, 獨逸가는 길에(1) (개벽 19, 1922.1.10).

    81) 田驊, 開埠以後上海乞丐群體成因初探 (上海硏究論叢 9, 上海社會科學院,1993).

    82) 阿片中毒 (동아일보 1925.6.1).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47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청방은 장개석 반대파 숙청

    등에 한 몫을 했는데, 鄧演達이 중심이 됐던 국민당임시행동위원회의

    와해가84) 그 한 예일 것이다.

    국민정부 치하 청방은 정치 세력과 결탁하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대

    중운동을 억압하는데 많은 ‘공헌’을 세우면서 청방 세력은 더욱 확대되

    었다. 청방의 조직원은 하층사람, 프랑스 조계의 순사, 형사, 공무원,

    유맹 정치가, 공장 감독, 노동 계약자, 황색노조의 간부 그리고 소상인

    에 이르기까지 퍼졌다.85) 중국인 통치 지역의 경찰은 물론이고 공공조

    계나 프랑스 조계의 순포까지도 청방회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범

    죄 단속 또한 쉽지 않았다.86)

    국민정부가 청방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편 근절도 쉽지 않았다. 국민

    정부는 점진적 아편근절정책에 따라 아편전매국을 두어 아편을 통괄

    관리하며 아편 흡식자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

    런데 이 아편전매국에 청방 杜月笙이 임명되었고, 청방은 강소, 절강,

    양자강 유역의 아편에서 그 주요 수입을 얻고, 남경 정부는 아편 전매

    를 통해 수익을 올렸다.87)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30개의 아편 취급소,

    15개의 모르핀 취급소는 청방에 영업 ‘보험료’를 납입하고, 청방은 이

    83) Brian G. Martin, The Shanghai Green Gang: Politics and OrganizedCrime, 1919-1937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p.135-41,178-80; Elizabeth J. Perry, Shanghai on Strike: the Politics of ChineseLabor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80; 楊相浩, 蔣介石이도 머리숙이는 便衣隊王 杜月笙, 上海事變과 便衣隊이야기 (별건곤 51,1932.5.1), p.14; 李活, 公認“깽그”團, 中國靑幇秘史小考 (開闢 신간 제4호,1935.3.1), p.41. 개벽에 실린 글은 민국16년(1927)의 일을 민국17년으로 오기했

    다.

    84) 第三黨首領 鄧演達의 人物 (東亞日報 1931.8.27).85) 李活, 公認 “깽그”團, 中國靑幇秘史小考 (개벽 신간 제4호, 1935.3.1),p.40.

    86) 楊相浩, 蔣介石이도 머리숙이는 便衣隊王 杜月笙, 上海事變과 便衣隊이야기

    (별건곤 51, 1932.5.1), p.13.87) 李活, 公認 “깽그”團, 中國靑幇秘史小考 (개벽 신간 제4호, 1935.3.1),p.42.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48들에게 얻은 돈으로 조계 경찰을 매수하여 그 영업을 보장했다.88)

    청방이 노동조합을 장악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청방원은 공

    장의 현장 두목이 되거나 노동계약자가 되었는데, 어느 조합이나 어느

    공장에도 ‘깽’의 그물이 쳐져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6大 工會의 지도

    자들은 청방에 가입했고, 청방의 영향권을 벗어난 독자적인 工會를 만

    들려는 1932년의 상무인서관 태업과 製帽, 製藥 등의 노동조합 활동은

    모두 실패했다.89)

    1931년 6월의 杜月笙의 家祠 건설은 아주 큰 볼거리였다. 杜月笙은

    1930년 족보를 만들고 50만 元을 들여 땅을 구입하고 유명한 장인을

    불러다 사당을 짓고 부설로 藏書樓와 學塾을 만들고, 각지에 초대장을

    발송했다. 5월부터 각지에서 예물이 답지했다. 6월 10일 杜月笙의 家祠

    준공식은 수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참배하고 차와 인력거의 왕래, 축하

    선물이 풍성하여 상해 개항 이래로 들어보지도 못했을 정도라고 신문

    들은 보도했다. 국민정부 주석 장개석, 前臨時執政 段祺瑞, 軍法總監

    何鍵, 육해공군부사령관 張學良 등 21명의 정계 유력 인사가 선물로

    편액을 보냈다. 杜月笙은 일개 깡패 두목이 아니라 이미 정계와 재계,

    노동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상해의 유명 인사였다.90)

    환락 세계의 이면에 각종 범죄가 횡횡하고 그 뒤에 조직 폭력배인

    청방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그야말로 범죄자의

    천국이었고, 이런 모습이 중국이 쇠락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상해의 환락생활은 대도회 생활에 대한 혐오감만을 부추키기도 했

    다.91)

    88) 金大馹, 秘密結社「靑帮」, 一千名의 勢力을 가지고 上海에 根據두어 (삼천리 8-12, 1936.12.1), p.135.

    89) 李活, 公認 “깽그”團, 中國靑幇秘史小考 (개벽 신간 제4호, 1935. 3. 1),p.44.

    90) 章君穀, 杜月笙傳 第2冊 (臺北:傳記文學出版社, 1994), pp.284-286; 楊相浩,蔣介石이도 머리숙이는 便衣隊王 杜月笙, 上海事變과 便衣隊이야기 (별건곤

    51), pp.23-14.91) 南游汗漫草 (三) (동아일보 1930.1.16).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49또한 상해가 이주민이 많고, 도시의 익명성에 따른 무관심은 범죄와

    더불어 비정한 상해의 이미지를 심화시켰다. 상해는 외국인도 많았지

    만, 광동, 절강, 강서 등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로서 이

    주민끼리 정보를 소통하며 거주지를 달리하기도 했다. 그러니 한국인

    이 상해에 오면 객주집 방안에서 하루저녁을 드새는 느낌으로 다른 지

    방의 사람이 제 지방의 기질, 방언, 취미, 관습 등을 가지고 한 방안에

    들어앉아서 서로 이상해하는 그 맛을92) 느끼는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다. 또한 길거리에서 인력거부가 죽어도 그냥 지나치고 총에

    맞아 쓰러져 있어도 구경만 할 뿐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93) 상해는 비

    정한 거리였다.

    피차에 친한 정이 생기지 아니하고 나는 나고 너는 정말로 너다. 너도

    혹시 가다가 내게 되는 법은 좀처럼 없다. 내 몸 일신만 알신하게 무사하

    면 옆에 녀석은 칼에 찔리거나 총알에 뚤이거나 나에게 동내의 집굿거리

    라는 별천지라. ······ 파리는 그래도 불란서 파리지 그런 세계인 공동거

    류지는 꿈에도 아니다. 불란서 맛은 맛대로 있고, 다음에 딴맛도 있는 데

    는 파리지만은 상해는 난장판이다. 아무나라 도시도 아니면서 역시 성대

    한 성장력을 가지고 연년히 부퍼지고 부해지기는 한다하는 유기적 사회

    다.94)

    한국인들이 수필이나 기행문, 기사 등을 통해 한국에 전달한 모습은

    화려함(그 이면의 식민성)과 어두움 이 양극단을 근대 도시 상해에서

    파악했고, 그를 절충하고 도시의 혼란을 통합하고 있던 도시 기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해 사회는 어떠한 통일적

    인 원리나 사회 통합 원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해는 파리처

    럼 독특한 특색이 있는 근대를 구성해가는 사회가 아니라 제멋대로고

    ‘난장판’이며 섣불리 남을 믿었다가는 “창자가 구천척이라도 다 빠지고

    홀쭉해지기 열이면 아홉인 엉터리 천지”였던95) 것이다. 한국인에게 상

    92) 巴里에서 開城까지(19) (동아일보 1926.10.27).93) 요섭, 文明한 世上? (동광 15, 1927.7.5), pp.32-33.94) 巴里에서 開城까지(20) (동아일보 1926.10.30).95) 巴里에서 開城까지(20) (동아일보 1926.10.30).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50해의 화려하면서 추악한 모습은 정을 주기 힘들게 만들었고, 간혹 애

    수를 자아내는 경우가 있어도 뺀질뺀질한 상해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

    었다.96) 달리 말하면 상해를 통해 본 근대 사회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정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상해에 범죄가 만연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기 때문에

    범죄 도시 상해의 모습을 부각하여 기술하였지만, 상해의 발전을 이면

    에서 뒷받침했던 조계가 주는 안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계는 외국

    열강의 ‘보호’ 아래 있는 안전 지대였기 때문에 태평천국운동 이후로

    수많은 중국인들이 전란과 재난을 피해 조계로 몰려들었다. 상해가 경

    제 중심지로 급속히 융성한 이유의 하나가 외국인에 의한 치안 질서의

    유지로써 생명 재산의 안전이 확보되기 때문에 중국의 대자산가 정치

    인이 이곳에 자본을 집중하고, 외국인도 남중국 방면의 경영 투자의

    중심을 이곳에 두었다라고 파악했다.97)

    工部局과 工董局은 조계 내의 도시 시설 관리와 질서 유지를 위한

    행정기관과 제도를 발전시켰다. 공공조계는 입법 기능을 가진 납세인

    회,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工部局을 두었고, 工部局 이사장(總董) 산하

    에 재무처, 경무처, 공무처 등을 두어 일상 행정을 담당했다. 그런데

    범죄와 치안 문제가 한국인의 눈에 확 띄었듯이 工部局이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경무처의 활동이었다. 工部局은 순포방을 11개소 설치하고 약

    4,800명으로 구성된 순포를 유지했다.98) 1908년 工部局 예산의 30% 이

    상이 경무처에 할당되었고, 1930년대에는 40%이상으로 늘었다.99) 그리

    고 工部局은 각국 거류민으로 조직된 의용대를 유지했다. 工部局은 치

    안유지에 치중한 행정을 펼쳤다.

    다음으로 도시 시설의 정비, 유지와 위생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工部局의 1932년 예산 가운데 26%가 도시 시설의 유지 항목에 배정되

    96) 江南夏夜散筆 故鄕벗에게 보내 亂想(一) (동아일보 1935.8.6).97) 洪陽明, 動亂의 都市 上海의 푸로필 (삼천리 4-3, 1932.3.1), p.34.98) 工部局 (동아일보 1935.11.14).99) 上海通社 編, 上海硏究資料續集 (上海書店, 1984 重印本), pp.745-46.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51었다.100) “상해 도시의 도로는 정미 완전하며 교통경찰의 발달과 여함

    도 殆히 동양 유일의 진보를 성하였다”라고101) 평가할 정도였다. 도시

    의 위생과 미관을 유지하기 위해 工部局은 쓰레기 처리 규칙과 경범죄

    조항을 통해 도시의 일상생활을 제도화하고 규칙화시켰다.102) 또한 이

    동성이 많고 인구가 밀집한 도시의 특성에다, 蘇州河의 선상가옥이나

    거지, 조계주변의 판자촌은 상해 전체의 위생 문제에 크게 관여된 것

    이었기 때문에 조계는 항상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조계

    는 전염병이나 사체 관리의 특히 엄격했다. 한국인 박경희는 음악을

    배우러 이태리로 가던 도중에 상해에서 2년간 머물러 생활할 때 낳은

    아이가 죽었는데, 이 사체 처리가 상해에서는 까다로운 수속이 필요하

    다고 느끼고 있었다.103)

    그런데 상해 행정에는 한계가 있었다. 화계, 조계로 도시의 행정권은

    나뉘어 있었지만, 도시는 기능적 분화를 통해 유기적인 관계로 맺어져

    분리 관리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치안과 위생은 인구의 이동을 고려

    할 때 조계나 화계 한 곳의 문제가 아니었다. 공공조계는 치안과 위생

    을 위해 판자촌을 철거하고 거지 등을 조계 밖으로 쫒아내고 판자촌을

    철거하며 주로 강압적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다. 하지만 상해 도시의

    기능적 분화와 조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런 조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행정의 공백을 메운 것이 상해의 商界를 위시한 민간단

    체였다. 각종 전란과 농촌에서 유입되는 빈민들은 사회 치안과 위생에

    심각한 위협이었기에 總商會, 各路商界總聯合會는 유민을 수용하여 기

    술을 전수하여 자립시킬 敎養院 설립을 주도했다.104) 민간단체가 노상

    100) 工部局1932年度豫算 (申報 1932.4.3).101) 上海寓客, 上海의 解剖 (개벽 3, 1920.8.25), p.107.102) 李丙仁, 上海 ‘都市民’의 형성 -移住, 適應, 그리고 生存- (중국근현대사

    연구 27, 2005.9), pp.45-50.103) 朴慶姬, 動亂의 上海, 一音樂家가 愛兒死體를 안고 울든 記錄 (삼천리

    13, 1931.3.1).

    104) 南北各慈善團體聯席會紀 (申報 1922.11.17); 婦孺敎養院招收婦孺乞丐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52횡사한 사체 처리, 고아 문제 등을 처리하기 위해 자선금을 걷거나 기

    관을 운영하는 등 상해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적지 않

    았다.105) 그런데 한국인들은 상해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한 도시 사회

    의 규칙과 제도, 그리고 민간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이 적었다.

    Ⅴ. 맺음말

    한국인들은 개인의 입장과 체류기간에 따라 다양한 상해의 면모를

    보았다. 기자, 상인, 유학생, 여행자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상해에 관한

    지식을 직접 체험을 통해 확인하거나 관점을 바꾸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많이 드러나는 특징은 외국인

    이 도시 건설을 주도하고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도시 행정의 주도권은 서양인이 행사하며 중국인은 참정권이 없고, 참

    정권이 주어진 다음에도 상해는 여전히 코쟁이들의 환락장으로 판단했

    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상해가 국제 대항으로 성장한 것 또한 외국 상

    인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주인은 자격을 잃고, 외국인이 중국의 고혈을

    빨아먹는 본영이 상해였다. 그리고 이런 식민제국과 대자본에 저항하

    는 도시로서 상해의 이미지 역시 부각되었다. 한국인은 상해에서 서양

    인의 침략과 상해, 넓게는 동양인의 저항을 보았다.

    다른 한편으론 남경로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의 번화함과 그 이면의

    환락과 퇴폐를 목격했다. 도로 주변의 고층건물, 바쁘게 돌아가는 일

    상, 교통 시설의 정비, 사체 관리의 엄격함 등은 상해를 살아있는 도시

    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거지 떼, 대낮에 횡행하는 유

    괴, 강도 등의 범죄와 비정함은 혐오감을 낳았다. 그리고 이런 어두운

    면에 관한 설명에는 상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인의 활

    (1924.2.15); 淞滬敎養院請斐總巡補助 (申報 1927.1.28); 淞滬敎養院請商埠署補助經費 (申報 1927.2.20) 등.

    105) 이병인, 근대 상해의 민간단체와 국가 (창비, 2006), pp.71-75 참조.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53동이 더욱 눈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편, 환락, 퇴폐, 조직폭력배

    그리고 그 배후에는 중국인 관리와 군벌의 부패가 있었다. 이런 모습

    은 상해에서 일하고 있는 인도인과 베트남인 순사에 대한 인상에서도

    마찬가지로서 이들은 골동품같은 존재였다.

    한국인은 상해의 도시 건설과 발전 구조를 서양인-근대-침략과 상

    해인(중국인, 동양인)-낙후-저항이라는 양자 대립구조로 파악했다. 이

    처럼 2분법적 구조로 상해를 바라봄으로써 도시 건설의 실질적 주역의

    하나인 중국인들이 했던 역할을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적었고,

    이분법을 넘어서서 연결하는 통일적 이해는 힘들었다. 도시 건설과 행

    정에 중국인의 참여, 국제 대항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이

    전통 상관행을 계속 따르며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켰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국, 좁게는 상해의 전통은 근대 사회로 이행하는데

    기여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1920-30년대 한국인은 중국의 전통

    상관습을 이해하지 못했고, 중국인이 서구를 모방하며 만들었던 혼종

    적 모습에 관심을 기울인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국인이 상해를

    통해 근대 사회 전환의 경로, 근대, 근대성을 다각도에서 성찰할 가능

    성은 낮았다.

    상해를 파악한 한국인의 인식을 논리적으로 연장할 때, 근대 사회로

    진입은 서양의 침략을 제거하되 서양식의 성장 방식을 모방하는 ‘저항

    과 모방’이라는 근대화 전략과 구조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저항과 모

    방’에서 저항에 강조점을 둘 경우 서양에 대한 ‘학습’이 늦어질 가능성

    이 커진다. 모방에 치중할 경우 일방적 추종을 낳을 확률이 높아지며,

    저항이 어려워지거나 모방할 주체의 형성이 늦어질 경우 ‘委託的’ 혹은

    대행적 근대화론으로 전화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근대를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으로 이해할 경우,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

    하는 동시에 ‘동양’의 과거를 부정하고 서양을 학습해야 하는 문제를

    낳는다. 그런데 ‘모던’ 상해에는 한국인이 본 상해의 이분법적, 대립적

    ‘근대’와 달리 자신의 과거와 전통의 부정이 아니라 양자가 병존하며

    상호 추동하고 있었다.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54

    동아일보 1920-1937조선일보 1920-1937申報 1922. 11. 17; 1924. 2. 15; 1927. 1. 28; 1927. 2. 20, 1932. 4. 3.開闢 제1호(1920. 6)-72호(1926. 8) 신간 제1호(1934. 11)-신간 제4호(1935. 3).동광 제1호(1926. 5)-40호(1933. 1).별건곤 제1호(1926. 11)-73호(34. 6).삼천리 1호(1929)-17호(1931. 7), 3권 제9호(1931. 9)-제8권 제12호(1936. 12)東方雜誌 30卷 13號(1933.7.1)孫科志, 上海韓人社會史 (한울아카데미, 2001).송규진, 日帝下 朝鮮貿易 硏究 (高大 民族文化硏究院, 2001).리어우판, 장동천 역, 상하이 모던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7).上海社會科學院經濟硏究所·上海市國際貿易學會學術委員會編著, 上海對外貿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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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國史硏究 第85輯 (2013. 8)156(中文摘要)

    ‘摩登’上海和韩国人所见的上海‘近代’, 1920-1937

    李 丙 仁

    19世纪20-30年代, 韩国人留下了很多关于上海的记录. 本研究的目的如

    下:其一, 以韩国人对上海的印象为依据, 揭示‘摩登’上海复合性都市的面

    貌. 其二, 通过分析韩国人共同关注的问题, 了解韩国人所见的上海‘近代’.

    其三, 通过比较韩国人所见的和漏掉的之间的差异, 察看上海都市发展的特

    点以及韩国人认识近代的局限性.

    韩国人所了解的上海都市建设与发展过程的内部机制是:西洋人、近

    代、侵略和上海人(中国人, 东洋人)、落后、抵抗的对立结构. 韩国人共同

    的想法就是:外国人主导了上海的建设与行政, 是引领经济成长的主力. 主

    人失去了资格, 上海成了外国人榨取中国血汗的大本营. 这也同时突出了抵

    抗殖民帝国和大资本的上海形象. 韩国人在上海看到了西洋人的侵略和上

    海人(乃至于东洋人)的抵抗. 除此之外, 还看到了以南京路为代表的近代都

    市繁华的一面, 同时也看到了其背后的纸醉金迷和颓废的一面. 近代都市的

    繁华与活力来自西洋人, 社会的阴暗面则大多与占据上海人口绝大多数的

    中国人的活动有关, 而其背景就是中国官吏和军阀的腐败. 在上海工作的印

    度和越南巡警也被看做是落后于‘近代’的古董.

    从都市发展过程看来, 中国人是发展上海、构成空间的又一个主力. 中国

    人参与了都市的建设与行政, 华人区街道和租界里具有中国特色的街道与

    南京路共同构成了上海. 中国人在经商时接受国际惯例的同时, 依然保留了

    中国人的经商习惯促成了工商业的发达. 上海就像是一个西洋与东洋的结

    合体, 它所展现出的是传统与近代并存的多层次的都市面貌. 韩国人把上海

  • ‘모던’ 上海와 韓國人이 본 上海의 ‘近代’, 1920-1937 (李丙仁) 157的’近代’理解为两者的对立结构, 而忽视了中国人在都市建设当中, 作为实

    质性主力之一所起到的能动性、肯定性作用. 也就是说, 韩国人没想到还可

    以有与欧洲模式不同的另外一种近代社会转换的途径, 而且也无法反思以

    欧洲为中心的近代、近代性.

    주제어: 상해, 한국인, 근대 인식, 남경로, 황포탄로, 식민도시, 환락과 범죄의

    도시

    關鍵詞: 上海, 韓國人, 近代 認識, 南京路, 黃浦灘路, 植民城市, 歡樂和犯罪的城

    Keywords: Shanghai, Korean, Modern recognition, Nanjing street, Huangputan

    street, Colonial city, City of crime and revelry

    (원고접수: 2013년 7월 11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8월 12일, 수정

    원고 접수: 8월 22일, 게재 확정: 8월 25일)